궁중 문화 연구원 (2006 ~ 2023)
제목 : 서한문 - 한 장의 편지가 전해주는 역사의 내면과 만나다
이름 : 원지영
등록일 : 2007-08-02 17:49:20

사료 속에서 나타나는 시대상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속에는 정제된 일부분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상호 간에 주고받았던 서한문은 자연스런 일상 언어로 쓰여진 개인의 감정, 시대 상황,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인물들 간의 갈등 구조를 보다 진솔하게 살펴볼 수 있다.


최근 발견된 사도세자의 편지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편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몇 번의 발작을 일으켰던 사도세자에게 우리는 그가 정신질환자였으리라는 다소 막연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고뇌나 깊은 사고에 대해서는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장인에게 보내는 그의 서한문을 펼쳐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힘겨워 했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또 세자로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던 마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는지를 공감할 수 있다. 이처럼 사도세자의 서한문에서 보듯이 정사에 묻혀 있던 개인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역사의 뒤쪽에 감춰진 이면의 사실을 새로이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서한으로 만나는 역사의 또 다른 재미일 듯싶다.

사도세자의 짧은 편지가 전하는 부친과의 깊은 골, 그리고 그의 고뇌 
최근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서한이 발견되면서 사도세자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의 고뇌에 찬 짧은 생을 새삼 깊숙이 들여다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서한 속 필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사도세자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기로 부친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조선 왕자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1753년 또는 1754년의 어느 날)
이 문장이야말로 사도세자의 짧은 생애 중 그의 고뇌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버지 영조는 83세로 조선 임금 중에서도 가장 장수한 왕이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영조는 신하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도 끼니때만 되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식사부터 해 재위 중 한 끼도 거르지 않고 건강을 챙겼다고 한다. 한편 몇 번의 광적인 행동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는 원래 글과 시를 잘 쓰며, 따뜻한 마음을 지닌 매우 영특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성적인 아버지와 감성적인 아들, 이 둘은 표면적으로도 잘 맞지 않아 보이는 부자였다. 특히 아버지 영조는 한번 누군가가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끝인 성격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여럿 마음고생 시켰다고 한다. 영조의 성격 때문에 가장 큰 마음고생을 한 이는 바로 마음 여린 사도세자였고, 그는 이런 아버지와의 벽 때문에 울화증이 생겼을 거라고 많은 이들이 추측하고 있다.
또 다른 편지에서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왕세자의 심적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1749년 어느 날의 기록을 보면, “대저 내 나이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건만 아직 한 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은 바 있고,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하고 미친 듯합니다.”라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이라며 절박한 맘을 그대로 담아 보내기도 하였다. 
서한문을 읽다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사도세자의 모습과는 달리, 그는 왕세자로서 국치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1755년 11월,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적는 등 장인에게 수차례 국가 경영 수업에 필요한 서적·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서한문의 발견은 영조와 사도세자, 홍씨 외척들의 보다 정확한 캐릭터를 찾아내고 복잡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시대의 그늘진 부분들을 들춰내는 또 다른 거울, 서한문
서한문 속에서 옛 사람들의 흔적을 찾다 보면, 그 시대의 주변 생활과 실질적인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시대의 경제와 생활사, 그 지역의 풍속이나 민속 연구에 있어, 서한문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서간문 (중요민속자료 제229-2호)’를 살펴보면, 경상북도 달성군에서는 1989년 현풍 곽씨의 후손들이 12대 할머니 진주 하씨의 묘를 옮기다가 발견한 유물 가운데 서간문 168점이 있었다고 한다. 묘 주인인 하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종질인 곽주의 둘째 부인으로, 출토된 편지들의 내용으로 보아 1646년경인 조선 인조 때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들은 각기 독립되어 있는 글들로 한글로 쓴 편지 146건과 한문으로 쓴 편지 5건을 비롯하여, 노비들의 문서와 양조법, 조리법 등 일상의 생활을 기록한 12건과 파손되어 알 수 없는 기록 5건이 있다. 편지는 주로 그녀의 남편이 쓴 글이 대부분이며, 시어머니와 4명의 아들들과 출가한 딸,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내사돈이 쓴 편지 등이 있다. 이 서간문들은 특히 부녀자의 주변 생활을 한글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 경기도 현풍 지방의 풍속과 민속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외 ‘서간문 (중요민속자료 제109-2호)’는 1977년에 청원군 석병산에 있는 채무역과 그의 부인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유물이다. 신촌 채무역은 명종 10년 생원을 시작으로 세자익위사대직을 지냈으며, 선조 27년 임진왜란 때 사망하였다. 그의 둘째 부인인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죽은 것으로 보여, 출토된 유물은 임진왜란 전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은 시신을 관에 넣은 후 관 내에 남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의복과 함께 당시 채씨 가문에서 오고 갔던 서류를 뭉쳐 여러 뭉치로 만들어 채워 넣은 것이다. 이들의 서간문은 채씨 가문에서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글로, 경제와 생활상의 용어 등이 보여 당시의 경제와 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한문의 내용을 통해 보는 옛 사람들의 철학과 학문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이 8년 동안이나 서한을 왕복하면서 사단칠정을 논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이는 현존하고 있는 ‘고봉문집목판 (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광산구)’을 보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실, 조선 선조 때 호남 성리학을 주도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가인 고봉의 문집목판이 보관돼 있다는 건, 우리나라 성리학의 역사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고봉의 시문집이 중심인 『고봉문집 원집』 3책과, 빠진 부분을 보충한 『속집』 2책, 동료들의 시문을 정리한 『고봉별집부록』 1책, 그가 강의했던 경전 내용을 모아 편집한 『고봉문집 논사록』 상·하 1책, 퇴계 이황과 오간 편지글을 정리한 『고봉선생왕복서』 3책, 오고 간 편지글 가운데 이기와 사단칠정에 관한 부분만을 따로 묶은 『이기왕복서』 상·하편 1책, 고봉이 퇴계를 만나기 전에 주자학에 관해 쓴 『주자문록』 상·중·하·속 4책으로 총 474매가 있는데, 비록 17세기에 만들어진 판본이라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호남 지방에 남아 있는 목판 중에서는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목판이라 하겠다. 특히 『고봉선생왕복서』 3책에서는 고봉과 이퇴계, 두 인물의 나라에 대한 걱정,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 특히 철학적으로 함께 고뇌하는 우정이 긴 역사와 함께 녹아 있어 보다 인간적인 내면들이 엿보인다.
다음으로 ‘사암집목판각 (시도유형문화재 제17호-광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사암 박순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새긴 것으로, 인조 26년 박순의 자손들에 의해 7권 3책으로 편집·간행되었으며, 그 후 철종 8년 다시 중간본이 발행되었다. 박순은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종 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전적부터 영의정을 거쳐 선조 20년까지 35년간 조정에서 일하였다. 
이 책의 권 1∼3에는 시 583수, 권4에 계啓 2편, 서 2편, 잡서 4편, 비명 7편이고, 권5∼7은 부록으로 행장, 축문, 제문, 신도비명, 상소글,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35㎝, 세로 22㎝이며, 모두 180매이다. 이 문화재는 35년간 조정에 있던 박순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무엇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여러 장르의 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줌으로써 조선시대 선조들의 문학적 소양을 조심스레 엿볼 수 있다. 특히, 조정에 있던 인물이 폭넓은 시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발굴하려 노력한 기록들은 조선시대 문학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각 지자체들이 자신의 지역 내에 잠들어 있는 서한문을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소중히 관리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서한문에 담긴 생생한 기록들이 그 지역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또 그 지역의 인물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한문의 기록들은 훌륭한 기록문화유산이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게시일 2007-08-02 16:07: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