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문화 연구원 (2006 ~ 2023)
제목 : 베트남 수호신의례와 축제
이름 : 관리자
등록일 : 2008-07-27 07:14:39

 전통 재생은 마을 정신의 회복_베트남 수호신의례와 축제 1 
  
 최호림 | 한국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위원, 덕성여대 겸임교수


마을 의례.축제 전통마을 이름으로 개최
1986년 ‘도이머이’(Doi Moi)’ 정책 실시 이후 베트남의 마을마다 수호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공동 의례와 축제가 활성화하고 있다. 하노이 시는 천도 1,000주년을 맞는 2010년에 맞추어 사회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하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전통문화를 발굴해 복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 마을의 역사와 결부되어 재생되고 창조되는 수호신 의례가 해마다 늘고 있다. 지금은 하노이에서 약 150개의 행사가 열리며, 중앙정부와 시에서 지원하는 것만 30여 개에 이른다. 정부에서도 관련법규를 만들어 의례의 조직을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가령, 1994년 이후 시행한 ‘의례규제’(Quy che Le hoi) 전문에는 ‘의례와 축제는 전통 문화생활의 한 양식으로서, 이미 인민의 정신생활에서 필요한 요구사항이 되었다. 미풍양속과 국가경제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의례 조직을 지도하고, 사회생활의 훌륭한 모범을 만들기 위해 이 규제를 공포한다’고 밝힌다.
최근 열리는 마을 의례와 축제는 대부분 ‘전통촌락’의 공동체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는 수호신 신앙과 이어진다. 수호신 신화는 마을의 창립설화로서 대부분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을 세워 왕권의 안정에 기여한 인물에 관한 것이다. 하노이에서 주목할 만한 전설에는 하노이의 옛 이름인 탕롱(Thang Long, 昇龍)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13개 농촌 마을’과 그 근원 마을인 레멋(Le Mat)에 관한 전설, 동일한 수호신을 모시는 남하(Nam Ha)의 잡뜨(Giap Tu)와 하노이의 다이옌(Dai Yen) 같은 ‘자매 마을’에 관한 신화, 그리고 이 글에서 살펴볼 ‘옥화공주’(玉花公主)의 전설같이 개별 마을의 시조신화 등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수호신의 업적에 관한 전설을 실제 역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 역사학계에서도 이러한 전설의 사실성과 구체적인 사료를 둘러싼 논쟁이 분분했는데, 결국 전설을 하나의 사실로 공포하고 마을 기원의 유구함과 공동 의례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활용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하노이 바딘구 프엉 응옥 하(Phuong Ngoc Ha)의 다이옌(Dai Yen) 마을의 수호신 의례를 살펴보자. ‘프엉(Phuong, 坊)’은 우리의 도시 지역의 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베트남 농촌의 ‘싸’(Xa, 社)와 같이 지방의 기초 행정단위다. 1954년 이후 행정개혁과 농업 집단화의 추진으로 친척과 이웃 관계를 중심으로 하던 촌락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응옥 하에 소재한 다이옌을 비롯한 다섯 개의 ‘전통촌락’(lang)들은 ‘랑’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최근의 마을 의례와 축제들은 전통마을의 이름으로 열린다.

엄숙한 의식과 축제의 결합 ‘le hoi’
다이옌 마을에는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유물을 보유한 ‘대안정(大安亭)’이라는 수호신 사당이 있다. 이곳에는 마을의 시조인 ‘옥화공주’를 흔히 ‘덕성’이나 ‘성황’이라고 부르는 수호신으로 모신다. 대안정이 1990년 ‘역사문화유적’으로 공인되면서, 옥화공주도 역사적인 인물로 공인되었다. 수호신 사당이 유적으로 공인된 이후 공주의 생일 의례 외에도 1950~70년대 의례개혁 시기에 억압되었던 음력의 절기 의례가 공동 의례의 형태로 복원돼 활성화하고 있다. 해마다 행하는 마을 공동의 절기 의례로는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뗏’(Tet nguyen dan), 원소절(Tet nguyen tieu, 1월 15일), 입하(4월 15일), 사죄망인일(또는 出夏, 7월 15일), 섣달 보름(공주의 제사, 12월 15일), 제야(12월 29일) 등이 있다.
2005년 음력 3월 14일 아침 8시 30분, 프엉 인민위원회 부주석이 축하문을 낭독하며 행사의 막을 열었다. “정부와 당은 민족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후손에게 미풍양속을 대대로 전하고자 하는 영도자의 노력으로 오늘 다이옌의 성황인 옥화공주의 910주년 생일을 기념하는 의례를 여는 것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어서 조직위원장이 ‘물을 마시더라도 그 기원을 상기하라’는 자국 속담을 강조하면서, 마을의 기원인 공주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서 본 행사의 제주(祭主)가 전통의례 복장으로 신보(神譜)를 낭독해 수호신의 역사적 내력을 밝히고, 신보를 올리는 의식을 수행했다. 그가 낭독한 ‘옥화공주 성황과 대안정의 사적’은 다음과 같다.

공주의 시호는 쩐 응옥 뜨엉(Tran Ngoc Tuong)으로 모친의 고향인 다이비, 즉 지금의 다이옌에서 을해(乙亥, 1095)년 3월 14일 태어났다. 리조에 마나-점성국의 적군이 침략했을 때, 임금이 출병하며 모든 백성이 종군하여 적을 물리칠 것을 명했다. 이때 겨우 9세가 된 응옥 뜨엉이 자신도 적을 무찌르기 위해 같이 가겠노라며 애원했다. 총사령관 리트엉끼엣 장군도 소녀의 진심과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적의 점령 지역에서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 응옥 뜨엉이 구장잎, 까우 열매와 라오 담배를 파는 행상으로 변장하여 적진에 들어가 첩보를 캐내 왔다. 이로써 아군은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임금은 소녀에게 옥화공주의 칭호를 내렸다. 갑신(甲申, 1104)년 12월 15일 밤,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돌변하고 폭풍우가 치더니 옥화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공주의 시체에 흰개미 떼가 모여 구릉을 만들었다. 왕은 이곳에 옥화공주의 사당을 만들게 했고, 주민들은 비문을 새기고 공주를 마을의 성황신으로 숭배했다. 옥화공주는 수많은 민족 열사 중 최초의 소녀 열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적에 따라 수호신 의례는 해마다 이틀이나 사흘간 열린다. 사람들은 이러한 수호신 의례와 전통축제 행사를 ‘레호이’(le hoi)라고 하는데, 엄숙한 의식의 절차인 ‘레’(le, 禮)와 축제에 해당하는 ‘호이’(hoi, 會)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즉 ‘레’는 엄숙한 제물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의식인 반면, ‘호이’는 다양한 놀이와 민속예술 공연과 경연대회가 어우러지는 일종의 축제다. 수호신 의례를 집행하는 주요 조직은 유적관리위원회와 헌향대다. 유적관리위원회는 마을의 공인 유적과 수호신 의례를 관리하는 상설 조직이다. 헌향대는 수호신 의례를 비롯한 전통적인 제례의 가장 정교하고 핵심적인 절차인 제물 올리기 의식을 행하는 조직으로, 보통 3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해마다 실제 행사는 하루 전(음력 3월 13일) 마을의 여성 불자회에서 불교식 의례인 ‘중생 의제례’로서 시작된다. 주민들은 이날의 불교 행사를 ‘구복 의례’라고 하는데, 이는 베트남의 불교가 수호신 신앙이나 정령 숭배와 같은 민간신앙과 어우러졌음을 보여준다. 엄숙한 제례의 핵심적인 절차는 ‘레타인’(le thanh, 聖禮)이라고 불리는 제물 의식이다. 제물 의식은 모두 여섯 가지 순서로 진행되는데, 향과 초, 꽃, 찹쌀떡.쌀 등의 음식, 과일, 차와 술의 순서로 다섯 차례 제물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수호신에게 선물을 받는 의식(thu loc, 受祿)을 행한다. 첫날 행하는 공주 알현 의식인 ‘떼옛’(te yet)을 비롯해 최소한 네 차례 이상의 ‘레타인’에서 동일한 제물 의식을 거듭한다.



‘마을 공동의 사업’ 수호신 의례 축제 형태로 복원
수행자들은 수호신을 위한 제물 준비에 정성을 기울이며 초자연적인 존재와 교감하고 신을 감동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국가가 사회주의 의례개혁 시기에 금지하고자 했던 전(前) 혁명적인 요소의 재생이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가령 적절한 제물을 골라 놓아두는 작업을 ‘깜르엉’(cam luong)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전통의례의 목표를 보여준다. 수행자들은 제사용으로 준비한 큰 쟁반에 깜르엉을 하고, 이것을 반드시 밝고 넓은 장소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중생은 절대로 깜르엉 한 쟁반을 앞서서 나가면 안 된다. 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끝나면, 부엌.우물.마당.나무 따위에 존재하는 여러 자연신들과 제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제물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성찬식으로 ‘양(陽)과 음(陰) 두 세계의 중생’에게 제물을 나누어 두 세계의 합일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기에 금지되었던 영혼과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미신적인 관습이 상징적인 전통으로 복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유적관리위원장은 미신이나 악습에 해당하는 의례의 절차는 복원하지 않으며, 진행하는 의식은 모두 미풍양속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령 소나 물소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은 낙후된 악습으로 지금도 금지한다. 위원장은 주민들도 낭비적인 관습과 합리적이지 못한 절차를 금지하고 복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잘 따른다고 주장했다.
마을 공동의 사업인 수호신 의례를 축제 형태로 복원하면서 한동안 사라졌던 민간 놀이가 선별적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이른바 문예 행사도 열린다. 문화통신부 산하 예술 연행 단체에서 활동하는 ‘인민예술가’나 ‘우수예술가’ 몇몇을 초대해 과거 여성의 민요인 ‘아다오’(a dao) 공연과 시 낭독, ‘콴호’(quan ho)와 ‘쩨오’ 공연을 벌인다. 콴호는 박닌(Bac Ninh) 지역에서 기원한 전통 민요와 창극인데, 혁명 이전 시기부터 북부 베트남 대부분 지방에서 의례 음악으로 보편화했다.
‘뜨엉’(tuong), ‘쩨오’(cheo) 등의 공연 행사도 열린다. ‘뜨엉’은 남부지방에서 유래한 민속 노래극으로서 중국의 경극과 유사하다. 뜨엉 공연을 위해서 전문 연기자를 초대하기도 하며, 주로 왕족이나 귀족, 영웅의 생활과 역사를 재현하는 내용이 많다. 반면 ‘쩨오’는 북부지방의 토속극에 뿌리를 둔 것으로, 전문 연기자보다 일반인을 중심으로 공연하는 일종의 풍자극이다. 특히 쩨오는 일상생활과 사회관계, 성 차별이나 신분 차별, 어려운 경제상황 등을 묘사하는 촌극으로 사회상을 반영해 주민들의 관심과 흥미를 끈다.
장기, 닭싸움 등의 민속놀이를 통해 경쟁을 벌여 상품을 타는 행사도 있고, ‘양생체육’ 행사도 벌인다. 양생체육은 체조 형식으로 변형된 전통무술 시범대회로서, 최근 건강에 관심이 많아짐에 따라 마을 노인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 흥미로운 것은 양생시범대회에 등장하는 구호가 ‘계획’, ‘완수’, ‘초과’ 등 농업 집단화 시절 공동작업을 할 때 사용하던 공식어로 구성된 점이다.



그래도 국가의 의도는 여전
이처럼 당이 복원되면서 다시 시작된 수호신 공동 의례는, 형식적으로는 민간의 전통이 혁명과 의례개혁의 영향에도 유지되어온 것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전통의 재생이 공동체로서 ‘마을의 정신’을 복원하는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의례개혁을 통해 금지하려고 했던 관념들이 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공동 의례에서도 저승이 이승에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의식들을 공공연히 허용한다. 개인은 국가의 혁명이라는 의도를 깊이 인식하지 않고 기복과 관련한 신앙을 실천하고 그와 관련한 놀이를 즐긴다.
그러나 그 실행 과정을 자세히 관찰하면 재생된 민간 의례에도 국가의 기능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공동 사당의 복원, 의례의 조직과 수행 과정에서 국가의 후광과 지원이 민간 의례의 복원을 보장한 점에서, 국가의 의도가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


 
 
 
베트남의 수호신 의례와 출제 2_지역 간 연대, 의례로 말미암다

글.사진 최호림 | 한국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위원

레멋과 ‘13짜이’의 연대의례
‘해마다 3월 23일이면, 사람들은 니하(Nhi Ha, 홍하의 옛 이름)를 건너 고향을 찾아오네. ‘경관’(京館)과 ‘구관’(舊館)이 손에 손잡고, 서호(西湖)의 물고기들도 구름을 타고 오는 듯 뛰어오르고 춤추네.’ 하노이 쟈럼(Gia Lam) 현의 레멋(Le Mat) 마을에는 매년 음력 3월 23일, 이같이 노래를 부르는 의례 행렬과 함께 성대한 ‘레멋 축제’가 열린다. 마을의 수호신 사당 ‘딩(Dinh) 레멋’에는 ‘호앙 장사’(Chang chai Hoang)를 성황으로 모시고, 그의 업적을 상징하는 몇 가지 현판이 남아 있다. 마을 수호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하루는 리타이똥(李太宗, 1072~1127)의 공주가 궁녀들과 용선을 타고 강에 놀이를 나갔다. 배가 어느 곡류를 지날 때 갑자기 크고 사나운 파도가 용선을 덮쳐 공주와 많은 시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행 신하들이 강변 둑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레멋의 호앙 씨 집안의 한 농부가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와 즉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는 용감하고 총명하게 그 기괴한 물결을 이기고 공주의 시신을 건져냈다. 왕은 그를 궁으로 불러 칭찬하고 상으로 금은보화를 내리고 관직에 봉했다. 그러나 호앙 장사는 조정이 내린 상을 거절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모아 ‘낑도’(京都) 교외의 황무지를 개간해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도록 토지를 하사할 것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허락했고, 호앙 씨는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을 모아, 홍하를 건너 탕롱 성 서부에 야생의 초목이 무성하게 덮힌 늪과 습지에 들어갔다. 호앙 장사는 이 황무지를 개간해 13개 농업 촌락(13 trai)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를 번성시켰다.
많은 사람들에게 레멋 마을과 ‘13짜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하노이 역사를 다룬 여러 서적에서도 이와 관련한 전설을 접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전해주는 전설의 근간과 그것이 전하는 역사적인 의미는 놀라울 만큼 일치했다. 이같이 ‘지방의 역사’를 근거로 레멋과 13짜이는 호앙 씨 수호신의례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연대 마을이 되었다. 매년 13짜이의 후손들, 즉 ‘경관’인 하노이의 해당 마을 주민들이 ‘구관’인 레멋의 의례와 축제에 참여한다. 레멋은 곧 13짜이의 원적이자 고향이고, 13짜이는 하노이의 전통마을의 근원이자 시조에 해당한다. 13짜이에는 리에우쟈이(Lieu Giai), 쟝보(Giang Vo), 투레(Thu Le), 반푹(Van Phuc), 꽁비(Cong Vi), 흐우띠엡(Huu Tiep), 꽁옌(Cong Yen), 응옥하(Ngoc Ha), 쑤언비엔(Xuan Bien), 빙푹(Vinh Phuc), 응옥카인(Ngoc Khanh), 낌마(Kim Ma), 그리고 지난 호에서 살펴본 다이옌(Dai Yen)이 포함된다.



역사 배워야 비로소 마을 사람 될 수 있어
13짜이의 주민에게는 레멋이 ‘근원 고향’(que goc)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왔다. 특히 해당 마을에서 4대 넘게 거주해온 ‘원주민’은 마을의 ‘근원 고향’에 대해 상세히 안다. 마을 원로들의 설명에 따르면 13짜이는 하나의 고유명사였고, ‘호앙 레’의 전설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공동체 정신의 유산”이었다. 유적관리위원회 위원들은 이주민들도 공동의례에 참여하여 이러한 ‘역사’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마을 사람’(nguoi lang)이 되는 것이며, ‘마을의 정신’(tinh lang)을 익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설’에 관한 이러한 해석방식은 일정 부분 사실성의 후광을 지니기도 한다. 사학계의 연구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13짜이의 역사는 베트남 역사학과 민속학 분야의 주요 연구 주제였으며, 특히 ‘하노이학’ 분야에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주로 13짜이가 11세기 리(Ly) 조나 이후 쩐(Tran) 조의 탕롱 성에 속했었다는 주장과, 17~18세기 레(Le)-응우웬(Nguyen) 조에 이르러 형성되었다는 주장 사이에 벌어진다. 최근에는 특히 각 마을의 수호신 사당이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건축된 점을 들어 후자의 주장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가설일 뿐 마을 주민들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었다. 마을의 의례나 공식적인 행사를 주도하는 사람들로서는 ‘역사’로 기정사실이 된 ‘전설’을 얼마나 아는지가 ‘마을의 공동체성’(cong dong lang) 혹은 ‘마을 정신’(tinh lang)을 공유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했다.
도이머이 이후 하노이 각 전통마을의 고유한 수호신의례가 활성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같이 여러 마을의 기원이나 역사와 관련한 유대를 기초로 하는 연대의례도 구성되었다. 이러한 연대의례와 축제에서 전설의 내용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13짜이와 레멋의 대표인 ‘쯔엉짜이’(truong trai)들은 매년 레멋의 공동의례를 주최하는 집행위원이 되고, 다른 13짜이의 연대의례에서 각 마을의 대표자로 참여한다. 각 마을 고유의 수호신의례에 13짜이 대표들을 초대하고, 다른 마을 의례에 사절단을 만들어 참여한다. 규모가 큰 행사에는 순례의식, 가마 들기, 제물 올리기 등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공동제사단을 구성한다. 레멋 축제에서는 6개 마을의 ‘헌향대’가 순서에 따라 헌향 의식을 수행하고, 의례의 마지막 순서인 ‘제물 나누기’(thu loc)는 13짜이의 대표들이 직접 수행한다.
‘하인흐엉’(hanh huong, 行香)은 각 마을의 성소를 순례하는 의식인데, 13개 마을의 의례단이 대부분 공동으로 참여해 연대를 과시한다. 순례 행사는 대개 개별 마을의 의례에 비해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참가자의 규모도 커진다. 레멋에는 ‘뱀춤’이 재현되었고, 응옥카인의 순례의례에서는 이마에 뿔이 하나 난 기린 모양의 전설의 동물을 가장한 민속춤(mua lan) 행사가 벌어졌고, 낌마와 꽁비의 행사 때는 ‘용춤’(mua rong)을 추며 마을의 화복을 기원한다.



형제마을 뜨와 다이옌의 연대의례로 표현
남딩(Nam Dinh) 성, 남하(Nam Ha) 현의 뜨(Giap Tu)는 다이옌의 자매 마을이다. 두 마을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두 마을의 관계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리 조의 어느 해에 뜨 사람들이 식량을 실어 험난한 뱃길을 따라 성에 도착해 세금을 바치고 돌아가는 길에 수심이 얕은 지역을 지나다가 배가 좌초할 위기에 빠졌다. 사람들이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궁리하던 중, 강 한쪽 다이옌이라는 마을의 작은 연못과 암자를 발견한다. 암자에서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더니, 잉어 할아버지가 홀연히 나타나 뱃머리를 들어 구해주었다. 홍 강을 따라 남하에 무사히 도착하자 뱃머리에 있는 돛대의 머리가 백학으로 변해 날아갔다. 암자에 모신 신성이 뜨 사람들의 순수한 신앙과 애국심에 감명해 이들이 무사히 귀향해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일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귀히 여겨 백학과 같이 긴 다리를 가진 향대에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다. 그날 이후 잉어가 남하의 강가에 떠올라 백학을 모시는 모습이 여러 번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학은 계속 마을 어귀를 떠돌며 살다가 어느 날인가 사라져버렸다. 그날이 바로 뜨의 의례가 열리는 음력 2월 8일이다. 후대에 전설을 전해 들은 많은 현학과 원로들이 비로소 백학은 돌아가신 옥화공주의 화신이고, 잉어는 공주를 모시는 신하이자 수호신으로 알게 되었다.
1990년에 <청년>(Thanh Nien)이라는 잡지에 두 마을의 관계와 옥화공주 설화와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당시의 베트남 국립사학원에서 찾은 여러 자료를 근거로 전설의 주요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두 마을의 원로들이 서로 방문했고, 두 마을 사당에서 같은 내용의 대구 현판이 발견되었다. 노인들은 ‘비로소 마을의 어머니를 찾았다’라면서 감격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잃었던 형제자매를 다시 찾은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이후 두 마을의 원로들은 당시의 기록과 관련한 족보를 찾아 두 마을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에 착수했다. 1994년 뜨의 공동 사당(Den Giap Tu)의 유적 공인을 추진하면서 비로소 두 마을의 의례 교환과 공동의례의 조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후 두 마을의 상징적인 자매 관계는 매년 공동의례와 의례 교환을 통해서 표현된다.
매년 음력 2월 8일 새벽 뜨의 연대의례에 참석하기 위해 50여 명의 다이옌 사람들은 버스에 오른다. 유적관리위원회와 ‘헌향대’의 성원들이 주축이 되고, 일부 청년들이 순례 행사에서 깃발을 들고 제례 용품을 운반하기 위해 참가한다. 뜨의 시장에 도착하면 자매 마을의 촌장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원로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잠시 인사가 오간 뒤 이 날의 본 행사를 알리는 순례의식이 시작된다. 도시 지역인 다이옌의 행사와 달리, 화려하게 꾸민 가마에 수호신상을 모시고, 그 뒤에 형형색색의 만장과 깃발이 이어지고, 악대를 동원하는 등 더욱 전통적이다. 수호신 사당에서 이어진 제례의식은 약 한 달 뒤인 음력 3월 14일 다이옌에서 치른 의식과 동일한 순서로 진행된다. 두 마을은 연대의례를 통해 전통을 복원하고, 서로 상대의 의례에 인력과 물자 면에서 유사한 지원을 주고받으면서, 의례적인 등가교환을 통해 유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두 마을 간의 의례교환이 연례적인 행사가 된 이후부터는 주민들 간의 비공식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마을 지도자나 원주민 원로 집안의 결혼식에 자매 마을의 주민들을 초대한다. 장례식에도 어김없이 지매 마을 원로회 성원들에게 부고를 보내고, 장례식 참가단이 조직된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친교와 의례교환에 열성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주민 지도자들이거나 의례 조직의 성원들이었다.



마을의 역사적 사실이 상상의 공동체 구성
이러한 의례 과정에서 수호신의 업적을 재현함으로써 역사가 된 허구에 근거를 둔 ‘상상의 공동체’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었음을 표현한다. 또 전통촌락 간의 연대의례는 지방 민간의 연대와 전통촌락 ‘랑’(lang)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적인 지방행정단위의 경계를 넘어서는 ‘전통 마을의 연대’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마을 간 의례교환은 ‘창조된 전통’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지방 간 연대의 가능성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