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 노력과 훈련으로 만들어지다
왕은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훈련과 노력이 필요했다. 과연 조선시대 왕자들의 태교에서부터 교육법은 어떠했으며,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과거 왕세자 교육을 통해 알아본다.
신성시 된 왕세자의 출생
왕비가 아기를 낳을 때쯤이 되면 궁궐 안은 바빴다. 먼저 아기를 낳는 일을 전담한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고 왕자의 출산을 준비하였다. 왕비는 태교胎敎에 만전을 기울였다. ‘임신한 지 석 달이 지나면 태아는 남녀의 모습을 갖추고 어머니가 보는 것을 따라 본다’고 인식한 만큼 좋은 태교는 필수였다. 왕세자는 출생하면 그 시작부터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왕세자의 태를 따로 모았다가 태실을 조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태실胎室이란 왕실에서 왕, 왕비, 대군, 왕세자, 왕자, 공주 등이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태를 보관하는 태실胎室은 대개 태옹胎甕이라 하여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봉해질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태실은 풍수지리 사상과 산신숭배 신앙이 더하여 명산에 묻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태봉이란 계란형의 지표 높이 50~100m정도 되는 야산을 골라 그 정상에 태를 매장하고 아래에 재실을 지은 공간이다. 「태봉리」라 불리는 지명들은 모두가 태를 봉안해 두었던 곳이다. 태봉은 산 위에 석물로 안치하는데 석물은 원형이고 아래로 구멍이 뚫려있다. 그리고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하였다. 실록에는 태봉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태봉 수호를 소홀히 한 이유로 지방관을 처벌한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지도 대부분에 태봉이 그려진 사례에서 조선 왕실이 태봉을 매우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세 살부터 시작되는 왕세자 교육 과정
왕세자의 백일잔치는 생각보다 검소했다. 왕이 몇몇 정승과 승지, 산실청의 관리 3명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였다. 원자 출생 1년 만에 치루는 돌잔치는 화려하였다. 종친과 정승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성균관 유생들과 백성들에게도 떡을 돌렸다. 1791년 정조는 세자(후의 순조)의 돌잔치를 창경궁 집복헌에서 열었다.
세자는 세 살 무렵부터 본격적인 학습에 들어갔다. 왕의 명령으로 원자를 교육시킬 ‘보양청’을 설치하고, 세자의 사부(師傅 스승)와 보양관을 뽑았다. 어린 세자가 주로 학습한 책은 왕실에서 보는 『천자문』과 유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소학』이었다. 『소학』을 통해서는 삼강오륜의 유학 이념을 생활화하였다. 세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며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약을 먼저 맛 본 뒤에 올려야 한다고 배웠다. 스승에게는 최대의 예를 갖추고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물려주고, 사도세자가 다시 첫돌을 맞은 정조에게 물려준 『소학』이 보관되어 있다.
세자가 5, 6세 무렵이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으로 바뀌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 때는 『소학』, 『효경』, 『동몽선습』 같은 책을 주로 공부하였다. 조선시대 당시 어린 왕세자의 학습 상황은 『보양청일기』와 『강학청일기』와 같은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이들 책이 다수 소장되어 있어서 원자 시절부터 세자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왕세자가 성인에 이르면 혹독한 후계자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궁궐에서는 세자시강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왕세자 한 명을 위한 교육에 최고의 선생들을 동원하였다. 이사, 빈객, 찬선, 보덕, 진선, 필선 등으로 불린 20명 남짓의 스승들은 세자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세자와 스승 간의 학습을 서연書筵이라 하였다. 왕과 신하 간의 수업이 경연이라면, 서연은 그 전단계의 학습인 셈이었다. 왕세자의 서연도 왕의 경연처럼 조강(朝講 해드는 시간에 하는 강의), 주강(晝講 정오 무렵에 하는 강의), 석강(夕講 오후 2시경에 하는 강의)의 하루 3번의 서연이 기본이었고, 소대召對와 야대夜對와 같은 비정규적인 강의도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과 같은 국난을 당했을 때도 왕세자인 소현세자의 서연이 계속 이루어질 정도로 조선의 왕실에서는 서연을 매우 중시하였다. 서연에서는 왕세자가 왕이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과목들을 강의와 토론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이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국조보감』 등 조선 왕들의 업적에 관한 책들이 주요 학습 대상이었다. 왕이 참석하여 세자의 교육을 점검하는 회강會講도 이루어졌다. 회강은 요즈음으로 치면 학습 발표회인 셈이다.
왕세자라 할지라도 시험은 피할 수가 없었다. ‘고강考講’이라 하여 정기적인 시험을 치루었다. 주로 책을 외우고 뜻풀이를 하는 것으로, 성적표까지 받았다. 성적은 시강원의 관리들이 채점하였는데, 통(通 우수), 약(略 보통), 조(粗 부족), 불(不 낙제)의 네 등급으로 매겼다.
왕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들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 때문에,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의례가 있었다. 왕세자 관련 대표적인 의례로는 책례冊禮, 입학入學, 관례冠禮, 가례嘉禮가 있었다.
책례는 왕세자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식 의식으로 왕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고, 세자가 이를 하사받는다. 『중종실록』에 “세자의 나이가 반드시 여덟 살이 되어야 책봉했던 것은 시선(視膳 왕이 들 수라를 살펴 봄), 문안問安, 입학의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어 8세를 전후한 시기에 책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적장자 세습이 원칙인 조선시대에 왕비 소생의 장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7명에 불과했다. 적장자로서 세자로 책봉은 되었지만 자질에 대한 문제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도 7명이나 있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거행하였다. 성균관 대성전에 있는 공자와 네 명의 성인의 신위에 잔을 올리고, 명륜당에서 스승에게 예를 행하고 가르침을 받는 의식이다. 왕세자의 입학례는 ‘차기의 태양’ 왕세자의 통과의례에서 매우 큰 행사로 파악했기 때문에 기록화로 남겼다. 1817년 순조의 아들인 익종(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모습은 『왕세자입학도첩』이라는 병풍으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책봉, 입학과 함께 왕세자가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로는 관례冠禮가 있었다. 오늘날 성년식을 말하는 것으로,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에 관례라 하였다. 왕세자의 경우 책봉식을 치른 후인 8세에서 12세 정도의 나이에 관례를 거행하였다. 관례를 치르면서 어엿한 성인이 된 왕세자는 혼례를 행하였다. 혼례식은 대개 관례를 행한 직후, 10세에서 13세 정도의 나이에 거행하였다.
책봉, 입학, 관례, 혼례를 치르면서 성인으로서, 차기 왕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친 왕세자. 그러나 왕으로서의 즉위는 꼭 보장되지는 못하였다. 선왕의 수명이나 의중, 세자의 자질, 정치적 역학 관계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이 자질 문제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각각 인조, 영조와 뜻이 맞지 않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만큼 왕세자가 왕이 되는 길은 험난했던 것이다.
▶글·사진_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사진_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일러스트_ 김이조
게시일 2008-09-03 11: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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