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예 연구소 (2003 ~ 2023)
제목 : [블레이드 러너]
이름 : 최형국
등록일 : 2004-02-23 21:49:02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이다.


 1980년대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제작된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또 다른 인간(합성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것은 과연 인간으로 봐야 할 것인가? 그전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내려져야 합성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서기 2019년 극도로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해 버린 황폐한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낙원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합성인간의 창조주 '타이넬' 사장의 집무실에서만 잠깐 찬란한 햇빛을 보낼 뿐, 늘 칙칙하고 암울한 비 내리는 날과 밤의 연속이다. 그런 찬란한 햇살과 옥빛 바다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구에 대신에서 인간은 상품화된 인간을 생산하고 식민지 별을 향해 그들을 보낸다. 그러나 합성인간들은 반역을 시도하고 폭동을 일으켜 지구로 귀환한다. 왜?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좀 더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4명의 합성인간들은 영원한 엄마의 별, 지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합성인간 제거 경찰인 '블레이드 러너'만이 반길 뿐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이 이뤄진다. 서양철학의 '나와 그리고 나에 대한' 사유는 곧 인간의 근원에 해당 것들이다. 데카르트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절대명제 코기토의 정신은 합성인간 그들에게도 복제되어진다. 합성인간들도 비록 다른 사람들의 추억이지만 회상하고 꿈꿀 수 있는 존재로까지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과 정신까지도 존재하는 합성인간 그들은 과연 인간들에게 '사살'도 아닌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들인가? 그렇다면 합성인간은 진정한 인간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들 그들이 인간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일 뿐이다 라고 생각한다. 단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커드와 레이첼의 살아남은 사랑만이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그러나 합성인간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도 하나의 완전한 객체로 인정받길 원한다. 첫 번째로 제거된 합성인간은 이러한 욕망을 '투명성'이라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술집에서 춤을 추던 그녀는 경찰을 피해 투명한 비닐 옷을 입고,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투명한 유리창을 부수며 도망간다. '투명성' 이는 곧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은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타자에게 몸의 시각화와 접촉이라는 것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라는 주체로 올라서게 된다. 여기에서 투명성은 곧 인간의 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표현이다. 즉, 아무것도 가리워 지지 않은 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 또한 진정한 인간이다'라고 강하게 고함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합성인간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화법'을 사용한다. 곧 인간의 논리성과 비논리성의 혼재를 통해 진짜 인간을 찾기 위한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 합성인간들은 가려진다. 그러나 최신버젼 합성인간 레이첼은 기억의 이식으로 인해 대화의 양이 기존보다 수십 배 늘어날 때 비로소 가능했다. 비록 합성인간 창조자 '타이넬'사장은 그의 피조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러나 만약 이후 기억의 이식이 무한확장하여 스스로 재구성하고 합성인간의 수명이 단지 4년이 아닌 몇 십년으로 늘어난다면 그들은 어떻게 구별해 내야 하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몸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뤄진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의 기억과 사유의 문제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를 먼저하고 그 다음에 기억과 사유의 문제로 인간을 규정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전투용 합성인간의 최후 발언은 이에 대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들을 보았다. 오리온 셔틀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비행선들을 보았고, 타호이져 바다의 어두움을 밝힌 명멸하는 빛들도 보았지.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 발언의 요지는 곧 내 몸을 통해 보여진 것들이 그리고 느껴지는 것들이 나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로멘스를 담당하고 있는 데커드와 레이첼의 관계 또한 몸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레이첼은 자신이 합성인간이 아님을 강변하지만 곧 데커드의 기억이식이라는 것에 의해 산산 조각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싹터가고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순간은 서로 눈을 맞대고, 피아노 선율에 귀를 귀울이고, 입술과 입술이 만나는 접촉을 통해 즉, 지극히 몸적인 부분으로 그것들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인 데커드와 합성인간인 레이첼의 사랑은 마지막으로 남겨진 종이로 된 유니콘처럼 어쩌면 저 머나먼 상상의 일일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그리고 그것의 이유를 좀 더 깊이 확인하려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의 의미는 확인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는 아주 편협한 시각이 몇 가지 눈에 띈다. 그 첫 번째는 동양인에대한 멸시적인 눈빛이다. 영화 내용 중 최하층민이 사는 공간은 어김없이 동양인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상품을 광고하는 대형스크린의 주인공은 늘 동양여자이다. 대형 비행선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별로의 이주를 권고한다. 아마도 머나 먼 미래 사회에서 백인들은 지구를 떠나 다른 깨끗한 별에서 살고 황폐해진 지구는 동양인들만 살고 있겠지라는 감독의 편협한 생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황폐한 지구에서도 '코카콜라'라는 팔리겠지 라는 막연한 제국주의적 환상에 따라 여기저기 coke 간판은 불을 반짝인다. 
 두 번째로는 지극히 남성주의적 시각이 영화의 로멘스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커드가 떠나려는 레이첼에게 던지는 폭력적인 언어들 '내게 키스해줘라고 말해', '나를 원한다고 말해' 라는 부분이 그녀에게 잘못 받아 드려 진다면 그것은 폭력적 남성우월주의의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합성인간인 그녀에게 그녀 또한 자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한 주체로 느끼게 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하였을지는 모른다. 

아무튼 상당히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겹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2004. 2. 최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