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예 연구소 (2003 ~ 2023)
제목 : 잠실에 뽕나무를
이름 : 심승구
등록일 : 2004-03-07 12:36:40

 오늘날 누구나 ‘잠실’ 하면 거대한 종합운동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 시설이 있는 지역을 연상한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이곳에 축구장, 야구장 등 수많은 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들어섰고, 한국 체육의 사령탑인 대한체육회, 엘리트스포츠의 산실인 한국체대가 들어섬으로써 잠실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스포츠 타운으로서 부상하였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이곳은 ‘부리도’ 라는 큰 섬이었다. 한강의 줄기가 성내천에서 석천호수를 돌아 종합운동장 옆의 탄천으로 흐르고 있었다. 1970년대 이 지역을 택지로 개발하면서 강줄기를 막아 섬이 아닌 육지가 된 것이다. 한말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는 3~4백년 된 뽕나무가 많았다. 
 조선왕조가 비단 생산을 위해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잠실은 본래 이 지역에 설치된 ‘누에를 기르는 장소’ 를 뜻하는 말이었다. 다만, 민간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한국의 양잠은 기후풍토가 적합하여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삼국이후로 국가에서 양잠을 권장하였고, 백제는 그 기술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고려는 양잠을 더욱 권장했으나 수요를 충당치 못해 중국에서 비단을 수입하였다. 이에 조선은 건국후 국가적인 사업으로 양잠을 크게 권장하였다. 태종은 궁궐에서 왕비가 누에를 기르는 친잠례(親蠶禮)를 시행하고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5도에 잠실을 설치하였다. 
 바로 오늘날의 잠실이 서울부근에 설치한 2곳 중 동쪽 잠실에 해당하였다. 서잠실인 연희동과 동잠실의 비단이 부족하자 뒷날 남쪽 잠실을 설치했는데, 잠원동(강남 고속터미널부근)이 그 곳이다. 또한 양잠의 번성을 위해 동소문 밖(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만들어 기원하고 <<잠업주해>>와 같은 서적을 간행하여 양잠기술을 보급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은 양잠을 농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다. 
 전통시대에 농경과 함께 양잠을 이처럼 강조한 까닭은 ‘衣食의 근본’ 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실크라고 불리던 비단은 당대 최고의 옷감으로서 천하고금에 이익이 되었다. 실제 비단값이 금값이라고 해서 금(錦)이라 썼을 정도였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빼면 번데기를 얻을 수 있었고 뽕나무는 뽕잎과 열매인 오디, 나뭇가지까지도 약제로 쓰였다. 
 양잠이 중시되자 민간에서도 며느리를 볼 때 누에를 몇해 길러 보았느냐가 결혼의 조건이었다. 누에 기르는 기술을 보는 게 아니라 누에를 기르면서 몸에 익힌 조심성이나 세심함을 미루어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누에를 길러 보지 못한 부잣집에서는 시집갈 딸에게 누에를 기르게 하는 가정교육이 습관화되었다. 
 먹는 쌀 한 톨, 몸에 걸치는 실 한 오라기가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은 것이 없고, 한 톨의 쌀알과 한 가닥 실오라기에 들인 정성과 노력과 인내가 농경과 잠상을 신성하게 여기게 한 것이다. 이처럼 옛 선조들이 실오라기 하나에 쏟는 집념이란 화학섬유가 대량생산되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요즘 거리에서 찢어진 청바지와 거리를 쓸고 다니는 힙합바지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시대의 변화가 참으로 크긴 큰 것 같다. 
 이제 지난 천년의 마지막 겨울 바람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다. 육백년전 뽕나무가 가득하고 누에를 기르던 장소가 있던 자리가 바로 오늘의 잠실인데, 지금 이곳에 당시의 모습을 찾을 길은 아무 것도 없다. 유일하게 그 지명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에를 치지 않으니, 뽕나무를 심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잠실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뽕나무 한 그루라도 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앞에 이곳이 5백년동안 누에를 기르던 잠실이 있던 자리라고 비석 하나를 세우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한 가닥 실오라기에 들인 선조들의 정성과 노력, 그리고 인내를 전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