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예 연구소 (2003 ~ 2023)
제목 : 기억의 망각에서 건저 낸 한 무사의 삶
이름 : 심승구
등록일 : 2004-04-24 11:16:11

'조선의 협객, 백동수' (김영호, 푸른역사), 2002. 9. <<서평문화>> 47집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 기억의 망각 ’에서 건져낸 한 무사의 삶 
             
                                                                                      심승구
                                                                            (한국체육대 교양학부 교수) 


                                                       Ⅰ

조선 왕조는 잘 알다시피 문을 중시한 사회였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 교서에서 ‘문무 어느 한쪽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文武不可偏廢)’는 명분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숭문언무(崇文偃武)의 관념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숭문언무’란 문을 숭상하고 무를 낮게 한다는 뜻으로 힘이나 무력보다는 정신이나 문화 역량의 강화에 더 비중을 두어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이다. 조선 왕조는 그러한 문치주의로 일관한 나라였다. 실제 붓을 든 선비들이 칼을 찬 무사들을 500년 넘게 지배한 사실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가 드문 일이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는 서양의 격언이 한국의 역사 속에서 확실히 증명된 셈이다. 
이렇게 문을 중심으로 발전해 간 조선 왕조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무인 또는 무사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문인 위주의 사회구조와 관료 체제 하에서 무사란 어떤 존재이고¸ 그들이 추구해 간 삶의 방식과 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의 좌절로 겪게 될 애환은 어떤 것이었을까? 등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주로 문인을 중심으로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데 몰두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계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 후기 최고의 무예가였던 한 무사¸ 그것도 서얼 출신 무사의 구체적인 일생을 통해 찾으려는 시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는 무예가인 김영호의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출발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하면서 이어온 왕조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방의 중요성을 더욱 새롭게 인식시킨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 의무병제인 오위 체제는 용병 중심의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체제로 재편되고 그에 따른 신무기와 전술 체제가 도입되면서 무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종래 화포와 궁술 위주의 장병기에다 조총을 도입하고 창검류 위주의 단병기를 보완함으로써 남왜북로의 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술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러한 전술 체계의 운영은 정조 시대에 이르러 전법서인 『병학통』과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로 최종 집대성되었다. 특히 『무예도보통지』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조선 무예의 완성’이자 ‘동양 무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조선 무예의 완성을 위한 집념을 불태우며 이를 체계화하는데 기여한 이가 바로 무사 백동수(1743~1816)였다. 
절개 있는 무장의 후손으로서의 긍지와¸ 그러나 서자의 신분으로서의 오욕을 한 몸에 안은 백동수는 삶을 의롭게 살다간 조선 무사의 또 하나의 전형이었다. 그는 최고 수준의 무예 능력을 갖춘 뛰어난 무사이면서도 무의 세계에만 한정된 인물이 아니었다. 시·서·화를 비롯한 유교적인 소양을 두루 갖추어 18세기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성대중 등과의 교류 속에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평가될 정도였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백동수의 생애는 18세기 조선 남아들의 삶과 우정¸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과정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볼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Ⅱ 

저자인 김영호 씨는 역사학자가 아닌 한 집념의 무예가다. 우연히 한국의 전통 무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임동규 씨에게 무예를 배운 후¸ 지금은 ‘24반 무예연구소’를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복タ뭇돎매陸贅뼈?24반 무예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무예서 편찬의 실질적인 총 책임자였던 백동수의 생애를 재조명하여 저서로 만든 것이 『조선의 협객 백동수』이다. 
이 분야를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몇 개 안되는 제한된 사료를 가지고 이 만한 분량(348쪽)의 책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고를 마무리하는데 7년이나 걸리면서 중도에 여러 번 포기하려 했다는 저자의 고백은 그래서 절실하다. 그때마다 누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이야기할까라는 자위와 추스름의 과정도 충분히 짐작이 갈 만하다. 저자의 무예 사랑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광범위한 역사 지식의 섭렵과 숨겨진 글재주가 온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전통 무예의 맥을 찾겠다는 저자의 집념과 노고에 대해 한국 무예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펴 온 평자로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머리말에서는 ‘누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이야기하랴’라는 글을 통해 정조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백동수를 주목하면서¸ 그를 통해 조선시대 무의 역사에 숨겨진 향내를 맡아 볼 것을 권하고 있다. 저자는 이 저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조선은 문약한 나라요¸ 무사가 천시 받던 나라라고 말하지만 조선 무사 백동수의 생애와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쫓다 보면 그 인식은 바뀔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백동수 개인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당대 선비들의 인생과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墟纛막館?편찬의 중심 인물은 물론¸ 역사에 미처 綏溝프?못한 이들까지도 살려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조선 무사와 민족 무예의 역사가 되살려지기를 바라며¸ 더불어 우리 무예의 전통을 이어받은 건강하고 패기에 찬 젊은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Ⅲ 

우선¸ 이 책의 본문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정조의 부름을 통해 전체 내용의 실마리를 풀고 있다. 제1장에서는 백동수의 출생부터 십대 후반까지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는 1743년 서울 명문 무관(평안 병사를 지낸 증조부 백시구)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부때부터 서얼의 굴레를 물려받는다. 어린 시절에 평생의 벗이자 매부가 된 이덕무를 만나고¸ 이어 박제가¸ 박지원을 벗으로 삼는다. 부친 백사굉의 영향으로 이인상¸ 이윤영¸ 원중거에게 가르침을 받고¸ 무예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으로 추정한다. 명망 있는 선비에게 배우고 재주 있는 벗과 사귀면서도 서자라는 신분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 때문에 상인¸ 건달¸ 농부¸ 백정 등과도 사귀며 낮은 곳에 처하고자 한다. 전설의 검객인 김체건을 흠모하여 그 아들이자 검술의 명인 김광택을 스승으로 삼는다. 의술·단학·글씨·그림에도 눈을 뜬 그는 과격하고 굽힐 줄 모르는 고삐로 묶으려 해도 묶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한다. 
제2장에서는 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까지의 젊은 무사 백동수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서얼차대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식 속에서도 백동수는 야뇌¸ 점재¸ 인재 등의 호를 고쳐 가며 자신을 추스르려 한다. 야뇌는 누추해도 당당하고 가난해도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가장 잘 표현한 호라고 추측한다. 한때 장사?눈을 돌리기도 한 그는 스물 아홉이 되던 1771년 식년 무과에 급제한다. 하지만 ‘선달’에 오른 것에 만족해야 했던 그는 박지원¸ 이덕무와 전국을 유람한 후 강원도 인제의 기린에 들어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한다. 벗인 이덕무¸ 박제가 등이 규장각 검서관에 선출되고¸ 증조부 백시구가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관직 진출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제3장에서는 사십대 초반부터 사십대 후반까지 백동수가 관직에 나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는 과정까지를 상세히 그리고 있다. 1788년(정조 12년) 장용영 군사에게 창검 무예를 지도하는 초관에 임명된 그는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 24기를 정리 한다. 특히 24반 무예를 교정하고 직접 시험하면서 정리하고¸ 군영마다 차이나는 부분을 표로 만들어 무예의 통일을 기한 그는 1790년(정조 14년)에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자¸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한다. 
제4장에서는 사십대 후반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그는 그 공으로 충청도 비인현감에 임명된다. 그러나 이듬해 세곡선이 비인 앞 바다에서 침몰한 일로 파직되고 곧바로 부친과 이덕무¸ 그리고 외아들의 죽음이라는 불운을 겪게 된다. 장용영에 복귀하였으나 정조의 서거로 인해 장용영이 해체되는 가운데 뜻밖에 박천군수에 임명된다. 그가 삼년 만에 파직된 원인을 저자는 당시 실권자들이 그를 벗인 이서구와 한패로 단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더 나아가 군수 재직 당시 뇌물죄로 1천리 유형을 받은 그는 법을 어기지 않고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속죄된다고 보았다. 1816년 74세의 나이로 향리인 포천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저자는 “애석하도다! 다시는 기남자를 볼 수 없음이여” 라는 성해응의 글로 대신하여 아쉬움을 달랜다. 


                                                     Ⅳ 

이상 저자의 책을 정리해 보았다. 백동수를 통해 저자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한 무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생동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아마 그의 생애를 통해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협적인 삶을 바라는 저자의 뜻이 담겨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평자로서 피할 수 없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우선 책에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점은 협객이라는 용어다. 저자는 책표지에서 협객을 ‘의로운 선비’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적절한 해석인지 의문이다. 실록을 비롯한 기록에서 몇 안 되는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협객이란 용어를 의로운 선비를 두고 쓴 사례는 좀처럼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용 한데로 사마천은 협객을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이면서도 약속과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박지원도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俠)¸ 재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을 고(顧)라 하며 협과 고를 겸하는 것을 의(義)라 하였다. 
의협 정신은 사실 무사가 지녀야 할 기본 덕목이다. 설령 백동수가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바탕을 타고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힘으로 남을 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무과에 급제한 후 장용영 초관으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현감과 군수까지 지낸 후¸ 고희를 넘긴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백동수를 협객이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박지원이 원사(原士)를 설명하면서 ‘아래로는 농공과 나란이 서며 위로는 왕공과 벗 할 수 있는 존재’라 했듯이¸ 백동수는 18세기 변화의 시대를 살았던 문무를 겸비한 조선의 무사이자 진정한 원사가 아니었을까? 또한 의문이 드는 것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백동수가 척계광과 정종유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가장 표준으로 삼았던 서적은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모원의의 『무비지』였다. 그러한 사실은 다른 책을 인용할 경우는 ‘모서 운운’이라 한데 대해 『기효신서』와 『무비지』의 경우는 반드시 ‘척계광왈 운운’¸ ‘모원의 운운’이라 하여 차이를 둔 데서 확인된다. 따라서 『소림곤법천종』을 지은 정종유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필자의 주장은 실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밖에 양주의 도봉서원을 용인에 있었다든지¸ 문무과의 응시 자격은 항상 같았음에도 조부가 서자라서 문과로 나가기 어려워 무과로 진출했다든지¸ 장용영 군사들의 백타를 권법이 아닌 제기차기로 설명한다든지¸ 모검은 곧 교전을 말하는데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지 않은 무예라고 설명하는 등의 오류도 눈에 띤다. 
무엇보다 이 책은 조선의 한 무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기적 역사 소설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만일 역사 소설이 아니라면 반드시 참고문헌이라도 뒤따라야 했다.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에는 저자의 노고 이전에 학계의 소중한 연구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실제 학계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책 그 어디에서도 학계의 도움을 받았다는 솔직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저자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다. 
불가피한 경우로 이해되지만 백동수 위주의 서술 구조를 갖다 보니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한 예로 백동수가 권력에 얽매이고 비굴해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탓에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강원도 기린 골에 들어가 농사를 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무과는 너무 많은 적체 인원 때문에 합격하더라도 관직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홍패를 안고 선달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백동수가 기린에 간 것이 권력에 얽매이고 비굴해지기 싫어서라기 보다는 과거 급제 후 관직 진출의 어려움에 따라 생계와 관련된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또한 백동수의 증조부 백시구가 7차례의 수령과 평안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지냈는데¸ 베풀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셋집에서 살았다는 대목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선비들의 삶을 기록한 방식에서 남을 도우며 청빈하게 살았다는 기록을 곧바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최소한 양반으로서의 삶은 유지하고 살았음을 전제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부 때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충청도 아산과 강원도 기린의 토지는 이를 잘 반증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조선은 문약한 나라요¸ 무사가 천시 받던 나라라는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선 왕조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문무의 균형을 통해 국가를 이끌어 간 나라다. 고려와 달리 조선 왕조가 무사 선발을 위해 무과를 실시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특히 국왕의 입장에서 문무의 균형은 국가를 가장 잘 이끄는 방법이었고¸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한 많은 병서를 편찬한 것도 그러한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이점에서 저자의 뜻은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고 본다. 
다만 문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과를 시행하고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졌다 해서 문약에서 벗어나거나 무사를 잘 대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조선 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왕조가 끝날 때까지 철저히 문인 관료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조 시대에 장용영이라는 친위 군영을 만들고 새로이 측근 무인을 양성하며¸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어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조대 『무예도보통지』의 편찬과 백동수에 대한 대우만으로 문약으로부터 벗어났다거나 무사를 천시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전체적으로 백동수라는 한 무사의 기이한 행적을 알리려는 저자의 뜻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본다. 박제가가 그를 ‘경서와 사기를 능히 논할 만하다’고 했고¸ 박지원이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다’고 했으며¸ 성대중이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란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백동수는 문무를 겸비한 무사가 틀림없다. 이점은 그가 문 중심의 사회구조 안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만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는 분방하고 일탈된 행동 양식을¸ 그러나 의협적 삶을 살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무예와 무사로서의 남다른 유교적 소양¸ 그리고 당대 북학파의 거두들과의 교류 등은 그로 하여금 관직 진출과 함께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참여라는 역사적 역할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한 역할이 가능했던 또 다른 배경에는 18세기 후반 서얼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면서 신분제가 해체되던 역동적인 시대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18세기 후반 급변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백동수는 서얼 무사의 전형적 모습을 어쩌면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된다. 자칫 ‘기억의 망각’에 빠질 뻔한 한 서얼 무사 백동수와 그와 함께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행적을 건져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사실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 

■심 승 구 
- 국민대 국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 
- 저서:『조선전기 무과연구』¸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연구』(공저) 
- 논문:“조선시대 무예사 연구”¸ “한국 무예의 역사와 특징” 등.